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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빈 감독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범죄 영화로,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정경유착, 권력형 비리, 조직폭력 등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실제 범죄 단속 시기였던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인물의 생존과 몰락을 통해 당시 사회 구조의 민낯을 들춰냅니다.
범죄와의 전쟁 영화 : 조직 문화
영화는 1982년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약 10여 년간의 시대 변화를 관통합니다. 특히 이 시기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도,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미비했던 과도기였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비공식적 권력, 즉 연줄, 인맥, 뒷거래가 주도하는 사회 구조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영화는 이 같은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최민식이 연기한 주인공 ‘최익현’은 전형적인 ‘아저씨형 인물’로, 출세나 조직의 이익보다 자신의 생존에 더 집중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세관 공무원으로서, 조직폭력배와 손잡고 금품을 주고받으며 출세의 길을 모색합니다.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비리 공무원의 모습이지만, 영화는 이를 단순히 비판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당시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속 조직폭력배들은 단순한 깡패가 아니라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의 언행과 생활은 일반 직장인과 다르지 않게 묘사됩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오히려 누가 진짜 ‘정상’이고 ‘범죄자’인지 혼란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도덕 기준과 구조적 부패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패와 권력의 은밀한 공생
‘범죄와의 전쟁’이 특별한 이유는, 이 영화가 단순히 폭력과 액션에 의존하는 범죄 영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화는 한국 사회 내부에서 권력과 범죄가 어떻게 공생하는가를 면밀하게 보여줍니다. 정치와 경찰, 검찰, 조폭이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하며, 겉으로는 단속과 법 집행이 진행되지만, 그 이면에서는 비밀스러운 연대와 거래가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선균이 연기한 검사 ‘조범석’은 정의로운 인물처럼 등장하지만, 결국 그 역시 권력 투쟁의 일부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최익현과 같은 인물을 처벌함으로써 자기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정의가 법과 제도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셈법과 이해관계 속에서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최익현의 몰락 과정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가 법적 처벌을 받게 된 계기는 단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더 이상 권력에 필요 없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말은, 범죄가 단속되는 것이 정의 구현의 결과라기보다는, 정치적 ‘정리’의 일부일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정말 이 사회는 정의로 작동하는가?”, “누가 진짜 악인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단순한 범죄 스토리를 넘어 사회 비판의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생존을 위한 선택
‘범죄와의 전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극단적인 악인도, 절대적인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물들은 모두 생존을 위해 자신의 도덕과 신념을 유연하게 바꾸며 살아갑니다. 최익현은 가족을 부양하고, 출세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보통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라, 그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자 했던 인물일 뿐입니다.
그의 선택은 그 시대의 많은 중년 남성들이 그러했듯이, 불법과 편법 사이에서의 현실적인 판단이었고, 그는 그것을 통해 가족을 보호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는 결국 철저히 ‘소모된’ 존재로 전락합니다.
영화는 그의 삶을 비웃지도,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살았던 방식이 당시에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도덕적 판단 대신 인간적인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또한 이를 통해 관객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회색지대의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범죄, 부패, 권력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들의 처절한 생존기를 조명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라, 시대와 구조가 인간을 어떻게 만들고 소모하는지를 냉정하게 그려낸 사회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1980~9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날카롭게 조명한 명작입니다. 조직과 권력, 생존과 배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 속에는,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닌 오늘날에도 유효한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녹아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권력 이면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